사방신(四神)

사방신(四神) : 백호

재이 JAY 2021. 12. 2. 22:08

Playlist (기억의 조각)

백호는 서쪽(西)을 관장하는 사방신으로 오행 중에서는 쇠(金)를 상징하며, 계절 중에서는 가을을 관장한다. 


 

 

 

 

 

“이제야 머리색이 새하얗게 되었네.”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마음에 들어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이제껏 살아있는 기간을 세어본 적은 없었다. 살고 싶어 산 것도 아니고 죽지 못해 살았다. 사는 것에 욕심은 없었는데 숨이 붙어있기에 ‘그저 살아 있는 것 뿐.’ 그렇게 생각하던 것이 어느덧 500번째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백호.”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주작은 웃으며 손가락으로 백호의 머리카락을 훑다가 손을 멈췄다. 멈춘 움직임에 백호는 슬며시 눈을 뜨며 말했다. 
“왜 멈춰?”
“… 다리가 아파서.”
주작은 제 무릎 위에 올려진 백호의 머리를 밀어냈다. 백호는 밀리지 않으려 했지만 주작의 무릎이 제 머리 무게로 인해 피가 몰려 붉어진 것을 보고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왜 말하지 않았어?”
 
 
 
[네가 편해 보였으니까]
 
 
 
늘 주작의 말은 옳았다. 백호는 주작의 곁에 있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의 곁에 있기를 바랐다. 주작의 붉은 눈과 언제든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가 태양에 비출 때 붉게 타오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기를. 언제나 주작이 하늘을 날 때면 그 하늘 아래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좋았으니까. 다른 건 바라지 않아. 그저 주작의 붉은 눈에 비춰 보이는 것이 자신만이기를. 주작과 함께 한 모든 시간과 자신에게 닿는 그녀의 모든 접촉이 백호를 편하게 만들었다. 
 
백호는 새하얗게 변해버린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자신의 두꺼운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는 느낌은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아, 주작의 손을 끌어와 제 머리 위에 올리며 말했다. 
“계속 만져 줘.”
주작은 한 번, 두 번 쓰다듬고 손을 거뒀다. 겨우 잡아 올린 손가락이 자신을 벗어나자 백호는 눈을 감지 못한 채 흘겨보았다. 
“한채아.”
“나는 더 이상 한채아가 아니야. 백호. 너도 더는 레오가 아니잖아.”
“……”
 
 
 
아니. 나는 백호가 되고 싶지 않아. 
나는 여전히 인간이었던 한채아를 사랑했고 오랜 시간을 지나 주작이 되어버린 한채아를 사랑해. 
꾹. 참아내고 참아냈던 고백은 우리가 인간의 모습이었던 그날부터 500년이 지나 자신의 머리색이 새하얗게 변한 지금까지도 말하지 못한 백호의 비밀이었다. 
 
 
 
애초에 백호-레오는 자신이 백호가 될 운명이었음을 알았고 서쪽의 범들 사이에서도 레오는 추앙받는 존재였다. 정작 신의 운명을 가진 자신은 오래 살 마음도, 누군가 위에서 군림할 마음도 없었는데. 우연히 들어선 서쪽과 남쪽의 경계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인간을 보았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모습. 
레오 자신이 운명을 거절하고 싶어 한들, 그렇게 태어난 이는 운명이라는 족쇄를 가진 채 그 능력을 나타내곤 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인간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 하지만 금방이라도 불에 타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인간은 왜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어찌 그곳에 있는지, 
왜 화염을 가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느꼈던 기운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이상하고 신기하고. 물론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레오 자신이 믿을 수 없는 것은 제 마음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화염에 휩싸였던 것을 무르고 레오에게 말을 걸었을 때 자신의 몸 속에 무언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다. 
“서쪽의 백호님께 인사드립니다.”
“날 알아?”
우습지. 백호라는 부름에 싫다, 거부해도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잖아. 레오는 피식 웃으며 인간을 바라보았다. ‘아. 넌 인간이 아니구나.’ 모르고 있어도 운명을 타고 태어난 이는 자신과 같은 운명을 가진 이를 느낄 수 있다. 
붉게 물든 단풍과는 다르게, 새빨갛다고 해야 할까. 검붉다고 해야 할까. 
안정적이지 않은 붉은 기운이 알려주는 존재. 
“… 남쪽의 주작.”
 
 
 
 
범 하나가 주작궁 주변을 서성인다는 소문이 들렸다. 채아는 이마를 짚었다. 분명 레오겠지. 실수로 한 번 들인 범의 발은 시도 때도 없이 서-남 경계를 넘어 다녔다. 분명 오늘도 같은 곳에 나타날 터. 따끔하게 말해주면 되려나. 
 
“우리 궁에 소문났더라. 누가 봐도 비상해 보이는 범 하나가 자주 보인다고.”
레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래. 네가 겁을 냈다면 경계를 넘지 않았겠지. 레오는 보통의 짐승과 다른 체력과 신체를 가진 탓에 백호궁과 주작궁을 제집 드나들 듯 다니곤 했다. 거리를 이동할 때에는 범의 모습으로, 채아를 만날 때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다녔으니 소문이 퍼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레오의 인간의 모습은 흙과 바위. 쇠를 다스리는 존재답게, 구릿빛 피부와 잘 다져진 근육이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레오의 눈은 모든 감각을 서늘하게 만드는 짐승들의 수장다운 범의 눈이었다. 
“그래서 걱정 돼서 알려주러 온 거구나. 채아가.”
“이제 그 이름으로 부르면 안된다고 말했잖아.”
채아는 눈을 흘기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 만남이 있던 날. 레오는 이름을 물었다. 채아 자신도 알고 있었다. 백호가 될 아이. 주작이 될 아이. ‘너와 나는 같은 운명이구나.’ 하지만 그도 자신도 완전하지 않았다. 주작으로 성장하기에 몸이 버텨주지 않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주작의 능력을 꺼내 사용하려던 찰나, 남쪽에서 볼 수 없고 느끼지 못할 기운에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서쪽의 백호님께 인사드립니다.”
불길이 일었으니 몸에 걸쳐져 있던 옷은 타버릴 수 밖에 없었는데, 어차피 자신은 인간이 아닌 신이 될 운명이라 부끄러움을 느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멀뚱히 서 있는 채아를 보던 레오는 얼굴을 붉힌 채 다가와 제 겉옷을 벗어주며 말했다. 
“네가 아무리 주작이라 해도 지금의 나에게는 보이는 게 전부야.”
처음으로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벗어준 옷을 서둘러 입으려니 익숙하지 않은 제복에, 늘 맡던 향이 아닌 낯선 향에 처음 보는 사내. 그리고 백호. 
붉을 대로 붉어진 얼굴부터 가리고 싶었다. 눈치라도 챈 것인지. 레오는 고개를 돌린 채 손을 뻗어 제 겉옷을 채아에게 입혀주며 말했다. 
“누가 주작 아니랄까 봐.”
 
 
 
 
-
채아의 다리는 레오가 몸을 일으킨 이후에도 여전히 붉었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에 등 뒤의 날개를 담요 삼아 제 다리를 가렸다. 500년이라는 시간이 신들에게는 길지 않은 시간일 지 몰라도, 적어도 그들에게는 오랜 시간이었다. 그만큼 채아가 숨기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빨리 알아챌 수 있었다. 
“뭐야. 누구야.”
자세히 보게 된 다리에는 데었다고 할까. 쓸렸다고 할까 싶은 상처가 있었다. 그 상처 위로 머리를 대고 누워 있었으니 아팠을 수 밖에. 채아는 아랫입술을 물면서 대답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것 또한 알고 있었다. 채아의 모든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레오는 알고 있었다. 
‘분명 사신 중 하나를 만났구나.’ 그가 자존심을 건드렸겠지. 
레오는 어렴풋이 생각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고귀한 혈통을 가진 그는 우리처럼 신이 될 운명을 가졌다 해도 타고 난 자체가 달랐다. 그런 그와 만났다면 노력과 시간을 들여 완성도가 높은 주작이라 해도 분하겠지. 
“청룡을 만났구나. 우리 채아가.”
채아의 이에 물린 입술을 손가락으로 달래어 빼내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았던 입술은 제 본래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레오는 순간 마음이 일었다. 여전히 그 붉은 눈에 담겨 있는 저의 얼굴을 가득, 오로지 자신의 얼굴과 좀 더 가까이 눈과 눈이 마주하기를 바랐지만 또 한 번 주먹을 쥐면서 몸을 일으켰다. 겁쟁이. 
 
 
 
[겁쟁이]
 
 
 
레오는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한 번 만났던 상대의 기척을 느낀 채아는 제 몸을 화염으로 휘감았다. 자신의 존재를 뽐내지 않아도 드러나는 기운만으로 그가 청룡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푸른빛의 비늘을 가진 자. 
무언가 깨우치면 푸른 빛을 가진다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레오 역시 머리색이 어느 순간부터 새하얗게 되어 있었다.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그저 채아가 만져주는 손길과 채아의 눈에 담긴 자신을. 그리고 손끝에 느껴지는 입술의 감촉이… 
 
“서쪽의 백호님은 잘 모르시나 봐요.”
“뭐?”
청룡은 성큼 다가와 레오에게 속삭였다. 푸른 비늘에서 번개가 일었다. 레오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웃고 있는 표정과는 다르게 서늘하다 못해 시릴 정도였다. 
“백호. 무언가를 깨우치면 몸에 표식이 남는다고 하죠.”
“……”
“저는 주작을 만나고 푸른색 비늘이 생겼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요?]
 
 
 
“……”
청룡의 묻는 말에 레오는 혼란스러웠다. 분노에 찬 것 같기도 하고 슬픔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아니 청룡의 질문에 처음 떠올린 것은 한채아였다. 그리고 주작을 만나고 푸른 빛이 생겼다는 청룡의 말에 저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의 당신으로는 저와 동등해질 수 없어요.”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이는데.”
금방이라도 상대를 얼어 붙게 만들 푸른 눈의 레오를 본 청룡은 그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자신과 마주 보고 있는, 자신과 같은 푸른색의 표식. 이제야 동등한 존재가 되었다. 
동쪽의 청룡-서쪽의 백호. 그 사이 남쪽의 주작. 
하늘 위를 지키는 자와 하늘 아래를 지키는 자.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자와 날개를 가지지 않을 자. 
하늘 위를 날 수도 있고 하늘 아래를 지킬 수 있으며 다른 신들의 능력마저 이행할 수 있는 자. 
사방을 지키는 신들이 사랑을 깨우치면 용은 푸른빛의 비늘이 생기고 백호는 하얀 털과 푸른 눈을 가진다라.
 
 
 
 
살고 싶어 산 것도 아니고 죽지 못해 살았다. 사는 것에는 욕심이 없었고 숨이 붙어있기에 그저 살아 있는 것 뿐이었는데. 채아를 만나는 5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랑을 알게 되었다니 그리 헛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완전한 백호가 되어 상대의 마음을 읽게 되었을 때 느낀 감정이라.  
청룡의 마음과 주작의 마음이 서로 같은 쪽을 향하고 있을 때의 감정이라. 

 

자신이 사랑을 품은 상대가 자신에게 숨긴 마음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챘을 때, 그로 인한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되어버린 시간은 너무나도 짧게 느껴졌다. 

 

 
 

단 (@w_dano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