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신(四神)
사방신(四神) : 현무
재이 JAY
2021. 12. 2. 22:08

현무는 생명의 끝, 곧 죽음을 알리는 북쪽(北)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
오행 중에서는 물(水)을 상징하며, 계절 중에서는 겨울을 관장한다.
물 아래 가라앉지도 물 위를 떠 있지도 않았다.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았고 세상의 중심에서 모든 사물을 바라보았다. 애초부터 현무는 인간과 신. 그 중간이었기에 신들과 어울리지도 인간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못했다.’
따돌림은 유년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의 성장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들과 함께라면 더욱 그러했다. 아마도 외형 역시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기에 그러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아이라니. 그림은 이미 수백 년을 살아온 현자였다.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이들은 당연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래서였을까.
그림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했다. 그러다 보면 문득 떠올리는 것들 중 누군가의 과거, 누군가의 미래를 느끼곤 했다. 아마도 누군가의 고민에서 벗어나게 해줄 방도를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표정 없이 다니는 현무에게 선뜻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모든 행동이 차분해 보이지만 현무를 둘러싼 강한 음기로 인해 어설프게 다가갔다가 해를 입을 지 모른다는 소문이.
‘모른다.’
하늘에서 내리는 물 한 방울을 손바닥으로 받으니 방울은 금세 얼어 붙어 우박이 되었고 하늘 위로 튕겨내니 눈송이가 되었다. 펼쳤던 손바닥을 하늘 위로 올려 주먹을 쥐었더니 급속히 내려간 기온에 눈보라가 치고 나무들과 땅에 심어진 식물의 잎이 그대로 얼어 붙었다. 그림은 발밑에 수북하게 쌓이는 눈을 보며 입김을 내 불었다. 그제야 언제 얼었냐는 듯이 녹아내리는 것들을 보며 눈 속에 깔려 있던 꽃 한 송이를 주워들었다.
“미안해. 이제 괜찮아.”
그래도 잠시 추위를 견디고 살아난 초록의 잎은 다행히도 싱그러워 보였다. 건강한 잎들을 보며 그림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외롭다.’
궁 안에 있는 큰 호수를 앞에 두고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내려두었다. 물 안팎에서 살 수 있는 동물들은 그림의 기운을 느꼈다. 곧 현무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그림은 한발씩 앞으로 내디디며 차가운 호수를 건넜다. 푸른색의 호수는 그림이 들어선 순간부터 검게 변했다. 마치 궁의 주인을 알아보듯이 그림이 발을 떼어낼 때마다 물방울이 튀고 발자국에 서리가 일었다. 시리도록 차가워진 발은 사람의 피부가 아닌 얼음 자체였다.
그림 자신도 몰랐다. 현무라 지칭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낼 수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현무궁인들 조차 모습에 대해서는 추측일 뿐, 현무의 모습이 거북이인지 뱀의 형상인지. 이무기인지 아무도 본 적도, 알아내지 못했기에 모든 감각을 세워 그림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림이 호수의 한 가운데에서 멈춰서자 뿌옇게 올라오는 수증기에 낮의 하늘인지 밤의 하늘인지 가늠되지 않는 안개가 서렸다. 안개는 때때로 환상. 환영. 또한 현상을 만들어 내곤 했다. 그 말은 즉, 각자 본인들이 생각했었고 보고 싶은 현무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결국 현무의 실제 모습은 현무 본인만 안다는 것이다.
…
그림은 감았던 눈을 떴다.
얼마 만에 느끼는 것일까. 아무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림은 처음으로 막힌 숨을 내쉬었다. 속이 뚫릴 것만 같은 차가운 공기가 뱃속으로 들어왔다.
후 -.
바닥에 깔린 얼어붙은 호수를 거울 삼아 자신의 모습을 비췄다. 여전히 작은 제 손. 여전히 작고 어린 아이의 모습에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실망이라도 한 거야?’
들여다보지 않았던 마음 한쪽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 목소리인 것 같으면서도 어쩌면 성장 후 자신의 목소리였을까. 그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온 몸이 떨렸다. 마치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을 짓누르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네 모습이 어떠하든 중요하지 않아.’
‘네 존재가 현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네 속에 살아있는 나 조차도 네 마음을 모르겠으니 검은 마음을 품고 있든, 마음 자체가 어둡든 늘 현무로서 자각을 가지고 살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아이야.
…
파스스. 안개가 잘게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깨져버렸다. 자신만을 위한 공간에서 벗어나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림에게 닿았다.
흑색. 아니 검붉은 빛이 그림의 몸을 감쌌다. 몇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이 멈춘 어린아이 모습이었지만 눈을 뜬 후부터 성장한 모습이었다.
소년과 청년의 사이.
그림은 자신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이들과 누구인지 모르지만 느껴지는 기척들에 보란 듯이 얼음 바닥을 발로 찼다. 그러자 얼음덩어리들이 공중에 떠올라 분해되고 물보라가 일었다. 그리고 넋을 놓고 광경을 바라보던 이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놀람에 내뱉지 못한 숨까지 얼려 버린 그림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누추한 현무궁까지 발걸음을 하시다니 송구스럽습니다.”
제법.
그들이 보기에 현무는 이제야 자신이 어떤 위치에 속해 있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자신들의 궁 안이라 해도 다른 신들을 보게 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제 궁인들과 수족들을 지키는 모습을 보니 현무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괜히 북쪽의 현무일까.
자칫하면 제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이다.
겉모습과 속 모습을 동시에 읽을 수 없는 상대는 현무가 유일하다.
“어서 오세요. 현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더는 혼자가 아니다.’
단 (@w_danother)